탁마_評

80회 한국어문회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 합격 후기

주인 탁마 2018. 3. 30. 15:06

합격 후기는 자격증이 도착하고 나서 쓰려고 했는데, 마침 오늘 도착해서 글을 작성하기로 했다.

자격증 사진이니 뭐니, 올리고 싶긴 한데 귀찮으니 저걸로 퉁치자..


-주의 : 서론이 깁니다.

 

한자시험을 처음 봤던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눈 모 학습지에서 준 포스터가 인연이 되어 한자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었다.

300자짜리 6급부터 시작했었는데, 어쩌다 합격을 하는 바람에 부모님도 덜커덕 욕심이 생겼나보다.

다음해에는 5급을 건너뛰고 4급, 중학교 올라가서 3급, 2학년때 2급까지 따는데 성공했다.

(중3때 2급을 딴 줄 알았는데, 글 쓰려고 기록을 찾아보니 중2때였다. 黑炎龍이 날뛰는 시기였구만)


그렇게 2급까지 가고 나니 1급 욕심이 안생겼겠는가.

심지어 그 때 당시에는 2급을 따야만 1급을 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잠깐 준비를 해보았으나,

3500자는 가뜩이나 시험준비다 뭐다 피곤하던 고등학생 입장에서는 꽤나 버거운 일이었다.

한자 2급만 해도 제2외국어를 한문으로 선택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지 않겠는가?

결국 '대학가서 준비하자'로 생각을 바꾸고, 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서는 고등학생 때 못 놀았던 한을 풀기라도 하는 마냥,

타성에 젖어 빈둥대기 시작했고, 결국 졸업할 때까지도 그 두꺼운 1급 교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1급은 영영 빠빠이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갓 사회에 나온 해 여름.

대학 때 없던 학구열이 불탔는지  갑자기 한자 1급에 대한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집 책장에서 먼지만 먹고 있던, 10년은 족히 넘은 1급 교재를 분철해왔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머리가 굳어버렸고, 집중도 잘 안되는 환경이라 

결국 1주일 만에 싱둥겅둥 접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2018년 새해가 찾아왔다.

보통 되든 안되든 새해가 되면 계획을 한 번씩 짜보지 않는가?

그래서 새해 계획에 무심하게 '공부'라는 단어를 적고, 그 밑에 무얼 쓸까하다가 

또 한자 1급에 대한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교재야 집에 있을테고, 시험 일정을 찾아봤다.

오마이갓, 한달 반 정도 뒤에 바로 시험이 있었다.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보통 1년에 한 번씩 치던 시험이라 준비기간을 길게 잡으려고 했는데

한달 반만에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시험이 6월. 거의 반년을 기다려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길게 잡으면 너무 루즈해질 것 같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냥 질러버렸다.

(이게 결과적으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만일 6월 시험이었으면 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한자 1급 교재를 펼쳤다.


-한국어문회 한자 1급 준비 과정


시험은 1달 반 정도 준비했다. 기본적으로 시간은 하루 평균 2시간은 투자했던 것 같다.

사용한 교재는 소위 '파랭이'라고 하는 어문회 제작 교재(의 매우매우 구버전)와

모 출판사에서 나온 기출문제집(문제 퀄이 기출과 너무 차이가 나서 힘겨웠다)이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20338

(본인이 사용한 구버전 파랭이 교재. 2005년 발행의 위엄이 느껴진다.)


맨 처음에 한 일은 한자 솎아내기. 2급까지는 그래도 기억에 남아있었던 터라,

1급 한자와 하위 급수에서 생소한 글자들을 노트에 옮겨적었다.

가나다순으로 했는데 솎아내는 분량은 무식하게도

가 / 나다라 / 마바 / 사 / 아 / 자차 /카타파 / 하

예를 들어 첫날에 'ㄱ' 한자를 다 솎아내자는 각오였다.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첫 날에 집어던질 뻔했다.

그래도 새해 버프를 받아서 주말빼고 10일 만에 1회독에 성공했다.

그리고 솎아낸 한자는 모를 때마다 옆에 체크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암기했다.

그 다음 준비한게, 부수체크.

사실 어느 정도 상위 급수의 한자들은 대부분이 형성자라 부수를 찾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생각과는 전혀 다른 부수가 등장하는 함정카드들이 있어서 한자를 보다가

'어, 이 한자 부수가 이거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한자가 있으면 노트에 부수를 같이 기록하였다.

그리고 나중 일이지만 기출을 보다보면 익숙한 함정카드들이 보인다. 결국 기출이 짱이었던 것을..

그 다음 준비한게, 장단음 한자 추려내기.

사실 2지선다 찍기 하는게 더 맘이 편하다지만 1급에서는 장단음이 10문제나 나오다 보니

합격을 안정적으로 하고 싶어서 이거까지 준비를 해봤다.

같은 음의 한자들 중에 어떤 한자는 장음이고 어떤 한자는 단음인지 추려내는 작업을 했는데,

결론은 가성비가 엉망이다. 난정장학금 타고 싶은 학생 아니면 안 하는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렇게 난리를 피워놓고 결국 시험장에서는 5/10. 딱 반타작이었다.

그나마도 공부 후반 때 다 까먹는 바람에

시험장 가는 버스에서 정리자료 잠깐 본 거에서 기억이 나서 겨우 맞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사자성어와 약자.

모르는 사자성어와 약자가 나오면 노트에 일일히 정리를 했다.

그런데 사자성어도 무작정 외우는 것 보다는 기출을 정리하는게 훨씬 효율적이다.

고사성어의 참 맛을 느끼고 싶다면야 말릴 이유는 없겠지만.. 너무 풍류가 아닐까..

사자성어를 정리하고 나니 이제 뭔가 한계가 온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거기다 한자어까지 일일히 하려고 하면 더더욱 난항에 빠지게 될게 뻔했다.

그래서 동의, 반의, 약자 부터는 그냥 기출을 정리하면서 공부하자고 생각했다.

지난 기출은 어문회 사이트에도 있고, 검색하면 모 블로그에 정리가 잘되어있으니 거기서 확인해서 풀 수 있다.

기출을 풀고 정리하면서 느꼈다.

'아, 기출이 짱이구나...'

기출을 많이 보다보면 익숙한 문제들이 보인다.

또 그런 문제들은 평범하게는 생각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아서(특히 동의, 반의에서 이런게 많다)

기출을 잘 풀고 오답과 생소한 개념을 정리하는게 도움이 많이 된다.

사설 시험지는 고등학교 사설 모의고사마냥 문제가 너무 지엽적이고 어려운게 많아서

풀다보면 오히려 불안감이 생기는 역효과가 났다.

마지막 까지도 어문회 기출은 넉넉한 합격점인데 

사설만 풀면 합격선을 넘나드는 점수가 나와서 적잖이 당황했었다.

어문회 기출만 열심히 봐도 도움이 많이 될 거라 생각한다.

단, 몇년에 한번씩 출제 유형이 완전히 갈아엎어지는 경우를 빼고는..


-80회 한자능력검정시험 1급 후기

그렇게 준비한 끝에 시험날이 밝았다.

1급 시험은 시험장도 전국에 몇 개 없어서 그나마 가까운 부산에서 치기로했다.

시험장은 부산의 화신중학교.

준비물은 수험표, 검은 펜 2자루, 학교 앞 다이소에서 산 수정테이프. 기출 정리 노트.


(서울에도 1개만 있는 시험장이 특이하게 부산에는 2군데나 있다. 다른 하나는 부산대.)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없었다. 1급 고사장은 달랑 1개반이었다. 그마저도 사람이 한 열댓명있었나.

대부분 나이 지긋한 아저씨, 아줌마들이었다.

2급 칠 때는 주변에 수염 기르고 도포 입은 할아버지가 계셨었는데,

1급 칠 때는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애들만 2명이 있어서 그것도 당황스러웠다.


시험은 본인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독훈음이 크게 헷갈리지 않는 선에서 출제되었다.

한자어도 무난한 편이었다.

장단음은 그렇게 외워놓고도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아 찍을 수 밖에 없었다.

내심 당락을 좌우하는 건 동의, 반의, 사자성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시험이 평이하다고 생각한 건 저 3개가 모두 추측 가능한 범위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천만다행이었지 진짜..

한자 뜻 쓰기는 사람 나름이니 적당히 썼고, 약자도 공부한 것들로 나와 모두 적을 수 있었다.


시험을 치고 나오면서 떨어지지는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준비한 성과를 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뻤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오고 일주일 뒤, 아침에 합격 문자를 받아볼 수 있었다.


한달 반의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나름 압축적으로 잘 준비해서 치른 시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과도 좋았으니 더할 나위 없었고.

13년만에, 목표하던 큰 산을 하나 넘은 느낌이다.

이제 전공 공부에 더해서 다음 목표 자격증인 JLPT 준비를 시작해야겠다.

JLPT 접수는 4월이다.